[스포주의] 문라이트 (Moonlight, 2016)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담은, 그렇기에 특별한 영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주변인들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까. 또한, 상처의 원인이 분명하고 그 원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그래서 상처가 없던 것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소년의 인생에서 주변 사람들은 이리도 잔인하다.
영화는 세 챕터로 나뉘어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제목으로 전개된다. 모두 주인공인 샤이론을 뜻하는 말이다.
리틀은 가난한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 왜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리틀일 때의 샤이론은 아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후안이 마약을 판매하는 구역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에 후안은 말 없는 리틀을 데려다가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주고 재워준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계속 이어져 리틀은 친모인 폴라보다 후안과 그의 아내인 테레사에게 더 의지하게 된다.
리틀일 때의 샤이론의 상황은 비교적 낫다. 비록 약을 하느라 리틀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어머니이지만 아직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이 남아 있을 때이고, 그의 친구인 케빈이 곁을 지켜준다. 무엇보다 후안과 테레사와의 만남은 기댈 곳 없던 어린 리틀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샤이론 챕터로 넘어오면서 위기를 맞는다. 수영도 가르쳐주고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던 후안이 죽고 어머니 폴라는 약에 더 중독되어 테레사에게 받는 용돈 마저 빼앗아 가기 일쑤다. 어릴 적부터 시달렸던 괴롭힘은 그 강도가 더해져 가고 있는데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이였던 케빈은 샤이론을 괴롭히던 무리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샤이론을 때린다. 사랑하는 이에게 외면당한 기분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샤이론은 그 분노를 표출하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모든 시간을 거쳐 블랙으로서의 샤이론은 완전히 후안과 똑같은 모습을 하게 된다. 마약을 판매하면서 금으로 이를 장식하고 좋은 차를 끌고 다니며, 왜소했던 샤이론은 어디로 간 건지 근육질의 커다란 덩치를 가진 블랙으로 성장한다. 무서울 것이 없지만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사는 블랙은 왠지 외로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던 그에게 케빈이 연락을 해오고 블랙은 속절없이 흔들리는 감정에 케빈을 찾아 나선다.
식당 요리사가 된 케빈은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블랙이 반가우면서 걱정이 된다. 그러고는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왔던 감정을 블랙에게 전달한다. 그를 외면했던 것,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것에 대한 죄책감 말이다.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하면서 또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더 성실히 살기로 했다고 한다.
블랙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케빈이었기에, 케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블랙의 생각을 좌지우지했을 테다. 어떤 기대감을 품고 왔던 블랙이었을 테지만 그의 담담한 사과에, 또 아무렇지 않듯 건네는 근황에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원망도 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덮을 만큼 사랑했던 이였으므로 케빈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고 마음을 전하게 된다.
한편, 오래도록 마약에 손을 댔던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블랙이 된 아들에게 사과를 건넨다. 이 장면에서 블랙과 후안은 더욱 겹쳐 보인다. 후안은 약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방치된 리틀을 데려오면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리틀과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원망하면서 어머니를 보낸 후안은 리틀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동시에 마약을 팔면서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양성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블랙이 된 리틀은 후안이 원했던 대로 어머니를 용서하기에 이른다.
후안의 말대로 원망하는 감정을 끌어안고만 있다면 해결되는 것은 없다. 마음이 후련해지려면 정말로 용서해주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저 후련한 감정보다는 허망한 감정이 더 컸다. 그의 인생에 지속해서 영향을 끼친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가정폭력(방치도 일종의 폭력이다), 그리고 그의 성격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 가장 사랑했던 이의 배신. 일평생 피해자이기만 했던 그에게 가해자로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들의 사과는 정말 샤이론을 생각해서였을지 그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서였을지 생각하게 된다. 당시에 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며 그들 역시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그랬기 때문에 샤이론의 삶을 보상받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저 그냥 모든 게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샤이론은 사랑하는 케빈도, 어머니도 모두 용서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를 그렇게 극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아니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리틀이나 샤이론, 블랙은 감정의 변화 속에서도 그것에 크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그의 감정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무표정에 가까웠던 것이 조금의 변화라도 보였을 때 그것이 더 극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샤이론의 분노, 블랙의 눈물이 이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삶은 변화하지 않는다. 블랙이 판매한 마약으로 또 다른 리틀이 나올 것이고, 또 다른 후안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의 삶을 어떠한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빈민가 흑인의 삶이라는 특정한 카테고리 안의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한 사람과 그의 주변인들이 그에게 끼치는 영향, 그로 인해 변화하는, 그러면서 변화하지 않는 삶 말이다.
한편,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며 놀랐을 부분은 아마 샤이론의 성 지향성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도 놀랐던 것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존재 부정은 가장 큰 차별이다. 소수에 관한 차별을 이야기할 때, 내 주변은 없어. 라고 단언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별인지 알고 있었으면서 나도 모르게 흑인 게이의 삶은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흑인의 삶을 다룬 영화라고 하기에 당연히 히든 피겨스와 같이 흑인으로서의 억압받았던 삶을 이야기하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수자로서 특별히 차별받는 삶이 아니라 그냥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흑인이라서, 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삶을 이야기한다.그러므로 재미가 없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전달해주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