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장애를 바라 보는 단 하나의 시선

본 지 오래돼서 완전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작 니모를 찾아서는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작품이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느라 신경이 과민해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답답하게 행동하는 도리의 탓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후속작인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전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므로 기대치는 바닥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작품은 나의 '인생 영화'에 오르게 되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도리는 우연이 가져오는 변화를 언급했는데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만약 영화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혹은 그러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보면 용기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영화는 도리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단기 기억 상실증(정확한 학술용어는 아닌 듯하다. 우리말로는 건망증으로 번역되고 있다)을 앓고 있는 도리는 부모인 제니, 칼리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부모님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어째서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기억이 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순간 순간을 살아가던 도리는, 아들 니모를 잃어버린 말린을 도우면서 그들과 인연을 맺는다. 1년 후, 우연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말린, 니모와 함께 기억의 흔적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찾는다.
영화는 이야기가 흐르면서 중간마다 도리의 기억이 교차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도리의 어린 시절은 장애를 가진 아이와 또 그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방금 한 말도 바로 잊고 마는 도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자신도 기억을 못 하는 사이에 무언가 실례했다는 생각에, 본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음을 언급하며 사과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에서 관객들의 뇌리를 강하게 박혔던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라는 대사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또한, 도리는 무언가 도움을 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도움을 청한다면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물론 도움을 주지 않았던 이들이 더 많았지만 도리는 그것마저 금방 잊을뿐더러, 한없이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점에서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도리의 부모님은 도리에게 어떤 게 위험한 것인지,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집으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참을성 있게 교육한다. 노래를 통해서든 그저 반복해서든 도리의 무의식에라도 기억이 남기를 바란다. 그들은 도리처럼 항상 밝아 보였지만, 가끔씩 밀려오는 걱정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결국,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급물살을 조심하라던 부모님의 경고를 잊어, 도리가 길을 잃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극히 현실을 반영한 서사다.
이 영화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 저마다의 장애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도리는 물론이고, 니모 역시 한쪽 지느러미가 자라지 않아 양쪽이 다르다. 도리가 부모님을 찾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우는 문어 행크는 다리 하나가 없어 도리가 우스갯소리로 셉토푸스(septopus, 원래 문어를 뜻하는 octopus는 숫자 8을 뜻하는 octa로부터 온 단어라고 한다. 그래서 숫자 7을 뜻하는 단어를 합성해 만든 언어 유희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데스티니는 지독한 근시여서 앞을 잘 보지 못하고, 베일리는 음파 탐지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밖에도 영화의 배경이 바다 생물 연구소이며 그들의 원칙이 다친 바다 생물을 데리고 와 치료해주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보니, 가끔 등장하는 이들 모두 크고 작은 아픔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믿고 기다려주는 제니와 칼리, 믿지 못하는 말린이 그러하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걱정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제니와 칼리는 도리에게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언젠가 도리가 기억을 찾아 격리구역으로 올 것으로 믿었고, 격리구역으로부터 나와 바다에 자리를 잡았을 때도 모든 방향으로 조개 길을 만들어 도리가 찾아올 수 있도록 했다. 그 믿음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조개였다. 반드시 도리가 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길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조개를 주웠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한편, 말린은 도리가 먼 길을 간다는 것이 불안해 함께 떠나오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대책 없는 도리의 행동에 금방 위기에 처하고 도리에게 심한 말을 하고 만다. 이후에 미안함을 느껴 도리를 다시 찾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베키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 말린이 보기엔 베키는 조금 얼이 나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니모는 말린에게 믿음을 강조했고, 말린 역시 동의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들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미련 없이 도리를 두고 돌아서는 부모와, 절벽에 가겠다는 도리가 걱정되어 몰래 따라가는 말린이 대조적이다. 하지만 말린의 우려와 달리 도리는 정말 절벽에 갔고, 둘은 함께 바다의 절경을 바라본다. 아마도 말린은 비로소 믿음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나오는 도리의 과거 회상 장면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수 십 번 반복했을 교육 끝에, 도리는 조개를 보고 집으로 돌아 온다. 이에 따라 제니와 칼리는 이제 도리에게 혼자서 나갔다 와도 된다는 허락을 하는데, 이 장면은 비로소 홀로서기가 가능해진 도리의 모습을 담는다. 결과적으로 도리는 중간에 많은 헤맴이 있었을지언정, 정말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밖에도 믿음은 영화에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앞을 보지 못해 바다로 나가지 못한다는 데스티니에게 베일리는 강한 믿음을 준다. 베일리 역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믿던 음파 탐지를 친구들 덕분에 해냈으므로 이런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또한, 행크는 다리 하나를 잃은 까닭인지 바다를 무서워하고, 평생 수족관 안에 갇혀 살기를 원했다. 키즈존의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손길 사이에서도 행크는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행크에게 도리는 믿음을 보여주며, 이내 함께 바다에 가기로 한다. 반대로 행크가 부모님과의 재회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는 도리에게 "너는 준비가 되었다."며 수족관에 넣어주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한편, 바다 생물 연구소의 시고니 위버는 반복적으로 말한다. 다친 바다 생물을 데리고 와 치료해주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 격리 구역에 있던 바다 생물은 다시 바다로 가거나 클리블랜드로 가는데, 클리블랜드로 향한다는 것은 '더 돌봐주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트럭이 뒤집히면서 모두 바다로 떨어졌을 때, 그들은 바다로 가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 즉, 진정한 'Release'의 의미란 믿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도리의 홀로서기를 정말로 '도움을 요청하지 말고 혼자 해라', '도리가 혼자서 다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둬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동정도, 외면도 아니다. "내가 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Dory' do?)"가 바탕이 된 이해와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물론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 역시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도리가 정말 혼자가 되었을 때, 도리는 말했다. What would `Dory'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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