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넘치던 대학교 1학년, 1학년의 전공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는 '국어능력과 현대사회'라는 교양을 따로 들었다. 알고 보니 이 강의는 취업을 앞둔 타과 4학년들이 국어능력 시험을 보는 걸 돕기 위한 수업이었고, 교수님은 전공자인 데다가 1학년인 학생이 이 수업을 들으러 왔다는 사실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본의 아니게 교수님의 예쁨을 받게 되었기에, 그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서 더욱 성실히 수업에 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써보는 날이었던 것 같다. 나의 자기소개서에는 아주 거창한 입사 후 포부가 담겨 있었다.
그때 썼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사람들은 입시를 거치면서 '시(詩)'는 너무 어렵고 재미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깨기 위해 시는 하나도 어렵지 않으며 멋대로 해석하며 읽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싶다. 따라서 시와 그 시에 대한 해석을 함께 실은 시집을 만들고 싶다. 물론 이때의 해석은 입시 때 배웠던 일괄적 해석이 아니라 시에 대한 느낌이나 나만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매우 거창한 말투로 써놔서 어이가 없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만의 생각일까.
어쨌든, 도서관에 갔다가 강신주가 그리 유명하다기에 인문학책을 읽을 겸 그의 저서를 몇 권 둘러보았다. 이때 발견한 책이 바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과《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다. 슬쩍 넘겨 보니 내가 언젠가는 출간하고 싶은 그 시집과 매우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다. (물론 그 깊이는 전혀 다르겠지만) 더군다나 철학적으로 시에 접근하다니!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두 권 중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다가 철학적으로 시 읽기란 왠지 괴로울(?) 것 같아서 '괴로움'을 들고 왔다.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라고 달았다. 괴로움과 유쾌함은 함께하기엔 모순적인 감정 같은데, 이 책에선 두 가지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시인들의 삶은 왜 그리도 괴로운지…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함께 괴로움을 느끼면서 시를 읽는 것은 독자에겐 참 유쾌한 일이었다.
가장 와 닿은 시는 문정희의 '유방'이란 시였다. 한 여성이 나이가 들어 유방암 검사를 받으면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담은 시이다. 아직 난 시적 화자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지만, 이 시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여성에게 '유방'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는지는 오직 여성만이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이 시를 뤼스 이리가레이라는 인물과 함께 페미니즘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챕터의 제목은 '차이의 포용 혹은 여성성의 문화'인데, 이를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여성성, 페미니즘에 관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너무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날 반성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처럼 이 책은 한 챕터마다 한 편의 시를 소개하고, 시인의 삶과 이에 대한 철학적, 사회학적 접근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 같이 부드럽게 전달해주는 문체여서 읽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담긴 이론들이나 '~주의'와 같은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어렵지 않게 설명하고는 있으나 하나를 깊게 파기보다는 여럿을 가볍게 보여주고, 관심 있으면 이런 책들을 더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는 식이어서 인문학이나 철학 초보자의 입문서로는 마냥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의욕과 관심을 가지고 읽은 거라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여 '더 읽어볼 책들'에 나온 책들을 모조리 읽어 보고 싶게 만들긴 하겠다.
한편, 이 책은 시를 읽는 데에 있어서 내 생각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항상 예술 작품, 특히 문학 작품을 접할 때에는 작가의 의도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 중심으로 작품을 파악하려는 것은 작품의 다양한 해석이 낳는 재미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실제로 의도한 것을 파헤치려고 한다기보다는 시에 담긴 철학을 소개하는 데 있어 작가의 삶을 살펴보는 식이다. 전후 관계가 다르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이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작가의 의미를 아예 배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담긴 작가의 삶과 가치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인데 말이다.
강신주라는 철학자도 알게 되고, 여러모로 괴롭기도, 유쾌하기도 한 책을 읽었다! 다음엔 이 책보다 먼저 나왔다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어보고 싶다. 말만 들어도 괴로운 철학과 시가 어떻게 즐거운지 확인해보고 싶다.
+
저자가 말한 건 아니지만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한 독자가 남긴 말이 참 인상 깊다. (저자는 이를 프롤로그에 소개하고 있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씨인지도 모른 채 씨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씨앗들이 다양한 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철학자가 뒤따라가면서 시인이 뿌린 씨가 어떤 꽃의 씨인지를 하나하나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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