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만화 중에 'ㅇㅇ에서 살아남기'라는 시리즈물이 있다. 이 영화의 부제를 붙이자면 '전장에서 살아남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만화에서는 'ㅇㅇ'과 같은 상황에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방법을 일러주지만, 이 영화에서 살아남는 것이란 그저 운에 불과하다.


  2차 세계대전, 독일군에게 밀릴 대로 밀려나 프랑스의 덩케르크라는 해안가에 위치한 지방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 영국군을 구출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놀란 감독의 전작 《인셉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다른 시간을 하나로 이어지게끔 한 연출이 아주 인상적이다. 지상군들의 일주일, 그들을 구출하러 가는 민간 어선의 하루, 공군의 한 시간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이내 같은 장면을 각각의 시선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얽히면서 마지막에는 하나의 시간으로 흐른다.


  놀란 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야기에 포스터만 보고 sf 영화를 기대하고 갔기 때문에, 군복을 입은 인물들과 곧이어 이어지는 총소리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소년 병사가 고요함 속에서 잡아챈 호외와 이어진 설명을 보고서야 전쟁이 주 배경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박한 음악 소리와 안심할 만하면 찾아오는 포탄 소리 등 여러 음향 효과가 어우러져, 총소리를 듣고 놀라 가슴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보는 내내 옮길 새가 없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이 긴장감은 내가 실제 전장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 불쾌해서 깊은 우울감을 불러일으켰다(배가 가라앉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2014년의 그 날이 떠올라 더욱 숨이 막혔던 것 같다).



허망한 죽음의 반복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개인의 역량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소년 병사 토미는 독일군의 공격에 조용하던 마을을 전력 질주하여 달아난다. 영화의 배경상 특별히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쫓길 대로 쫓겨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통의 전쟁 영화에서처럼 전우애를 발휘하며 반격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가 토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만다. 그 과정은 어이없을 만큼 빠르게 끝나 매우 허무하다. 



  겨우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토미는 그들의 냉정한 눈빛을 뒤로 한 채 해안가로 도망가는데, 그곳에서는 약 40만의 군사들이 구출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다. 한쪽에는 전우의 시신을 묻어주는 깁슨(그의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이 있었는데, 시신은 맨발이고 깁슨이 그제야 군화의 끈을 묶고 벨트를 추슬렀던 것으로 보아 시신의 옷을 뺏어 영국군으로 위장하고 있음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토미와 깁슨은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마치 마음이 통하는 듯 움직였고, 줄을 선 이들보다 먼저 배를 타기 위해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함께 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그들이 간절하게 타고 싶었던 배는 적군의 폭격으로 가라앉게 되고 그들이 옮겼던 부상자 역시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 그들이 부상자를 옮긴 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짧은 찰나에 타인에 의해 결정지어진 그의 운명 역시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토미나 깁슨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어차피 죽음이 널린 곳에서 부상자의 운명은 아무도 몰랐으므로.


  한편 그렇게 살아남은 둘은 가라앉는 배에서 또 한 명의 병사 알렉스를 건져 도와주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라앉은 배에 타고 있던 인원들을 우선으로 바로 다음 배를 타게 해줘서 셋은 약간의 편법으로 그 배를 탄다.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에 선실로 들어가 배를 채우는 둘과 달리 깁슨은 따뜻한 차와 빵도 먹지 않고 계속 밖에 있다. 언제 또 이 배가 가라앉을지 모른단 생각에서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알렉스는 토미에게 이유를 묻고, 그런 그를 너무나 잘 이해한다는 듯 토미는 대답한다. 토미와 알렉스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출구 쪽에 가까이 서 있었는데, 어뢰 공격을 받아 가라앉는 배에서 깁슨은 혼자 탈출할 수 있었지만, 기어코 잠긴 문을 열어주어 토미와 알렉스를 살린다. 그렇게 또 죽음을 겨우 벗어난 이들은 다시 그 해안가에 앉아 자살하는 병사의 모습을 본다.



  수없이 많은 죽음에서 살아난 병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을 택하고 거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행동을 우리는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40만 중 한 명이 된 듯 관객 역시 잠시도 숨을 편안히 쉴 수도 없고 죽음을 몰고 오는 적군 전투기 소리에 긴장하는 나날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극도로 우울한 감정은 반복되는 허망한 죽음들로부터 찾아온다. 해안가에 줄을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배는 출발 하고 나서도 적군의 폭격으로 너무나 쉽게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안가가 안전한 것도 아니다. 적국의 전투기는 사정없이 탄을 떨어뜨렸고 잔교 위에서도 해변에서도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었다. 전투기가 뜨자마자 모든 이들은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떠한 저항 없이 몸을 바닥에 바짝 붙이거나 최대한 움츠린다. 그나마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지만 모두가 똑같이 그러고 있을 때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다. 어떠한 기준으로 살아남을까. 그런 기준은 없었다. 그저 운이다.


  그밖에 허무한 죽음도 있다. 영국군은 군의 큰 배들이 계속해서 적국의 공격을 받자 민간 어선들에 차출 명령을 내린다. 작은 배들이 더 유리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소형선 선장이었던 도슨은 이러한 군의 명령을 따르는 듯하다가 아들 피터와 함께 직접 덩케르크로 떠난다. 군에게 배를 맡기지 않고 본인이 구해오겠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전투기 조종사였던 큰아들을 전쟁 초기에 떠나보내고 자기 아들과도 같은 이들을 구하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피터 역시 자신의 형과 같은 이들을 위해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들에게 약간의 환상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지는 그들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신문에 이름이 실려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녔던 소년은, 죽음이 난무하는 덩케르크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정신을 놓아버린 군인과의 몸싸움으로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죽는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이밖에도 많은 병사가 그저 배를 옮겨 타다가 배와 배 사이에 끼어 다치거나 기름이 샌 바다에서 본인들을 구하러 온 어선을 코앞에 두고 불에 타 죽는 등 허망한 희생을 치른다. 공군의 리더로 나왔던 인물은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이 없다. 톰 하디나 킬리언 머피와 같은 스타 배우들을 썼음에도 그들의 극 중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장면도 거의 없을뿐더러 이름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을 만큼 살아난 사람1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영화의 진행을 위해 세 개의 다른 시간 속에서 각각 그 시간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나뉘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인물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들이 언제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타 영화들에서처럼 주인공이 얼른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주인공이니까 무조건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국뽕 영화? 위선을 보여주는 영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역사적으로도 '덩케르크 정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좋은 선례로 남아 있다. 국가의 위기 상황 때 민간인들까지 나서서 도와줌으로써 30만이 넘는 인원을 살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칭송하기 위한 장면들 때문에 소위 '국뽕(지나치게 국수주의에 심취한)'영화라는 별명을 단 것 같다. 영화가 절정에 이르면서 도슨의 배 하나만이 아니라 많은 배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신이 그러했고, 그를 바라보며 "조국(Home)"을 외치는 사령관이 흘린 눈물이 그러했다. 더군다나 연료를 다 써가면서 끝까지 적군의 전투기를 격추한 파리어는 비상 탈출을 하지 않고 적군에게 전투기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끝까지 남아 뒤처리를 하다가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이 조금씩 모여 '국뽕'의 느낌을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뽕 영화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위선을 담고 있다.


  사실 영화의 처음부터 영국이 부끄러워할 만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40만의 영국군들이 일주일 동안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배를 반복해서 타는 동안, 그 시간은 누가 벌었던 것일까(역사적으로 히틀러가 전면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논외로 친다).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토미는 독일군에게 쫓긴다. 정말로 독일군이 코앞까지 왔음을 뜻한다. 그런 토미를 구해준 것은 프랑스군이었다. 그러나 배를 태울 땐 영국인들 먼저 타야 한다며 외치고, 영국과 프랑스군 모두를 구하라는 처칠의 명령에 숨겨진 뜻은 영국군 먼저 살리라는 것이었다. 배를 타는 순서에도 밀렸으며 코앞까지 온 독일군들을 막고 있었던 이들은 프랑스군이었다. 민간 어선들 덕분에 3만이 목표였던 작전이 30만이라는 큰 성공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령관은 그제야 프랑스군까지 돕겠다며 남는다. 그리고 그런 사령관을 보며 대령은 존경한다는 듯 경례를 한다. 그것은 한 편의 코미디로 느껴질 정도였다.



  더 큰 위선은 전쟁 자체에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무기를 다루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독일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던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토미를 비롯하여 아직 앳되고 무기력해 보이는 병사들은 총기를 잘 다루지도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생사의 갈림길로 내몬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오던 도슨 역시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쓰고 있는가." 다음 전쟁을 위한 전력 낭비를 하지 않도록 구조선의 숫자도 줄이고 전투기도 띄우지 않는 정부와 40만 중에서 무려 10만을 잃었지만 30만이라는 전력을 구해올 수 있었음을 칭송하는 이들. 그리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총을 안겨 주려는 처칠의 연설에 담긴 위선은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락함을 느낄 새도 없는 토미의 흔들리는 표정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권력을 탐하며 전쟁을 일으킨 이들에게는 희생된 10만 명, 아니 모든 군인 하나하나가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 위선과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이들은 도슨으로 대표되는 많은 어선이겠다. 실제로 당시 어선들은 그저 사람들을 실어 오기만 하는 줄 알고 출발했다고 한다. 그곳은 전쟁터였는데도 어선을 동원하기 위해 그들을 사지로 몬 것 또한 권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이런 점이 조금 '국뽕'스럽게 느껴진다. 무척이나 대단한 일임은 분명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조금 더 덤덤히 그려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놓고 표현하지 않아도 관객은 다 안다). 어른들의 잘못을 통감하고, 희생된 이들을 한 명이라도 구하려는 도슨의 모습이 그러하다. 공군 피어리의 희생적인 행동도 어떠한 권력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해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영국에 도착한 후에 살아남은 병사 한 명이 공군 제복을 입은 콜린스에게 공군을 비난했던 것처럼, 개인의 희생은 아무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는 점이다. 


  한편 깁슨은 비록 살기 위해 국적을 속이긴 했지만, 주변인들을 돕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토미에게 수통을 주어 물을 나눠 주었고, 처음 탄 배에서 쫓겨날 때도 배에 다시 탈 수 있도록 토미에게 사각지대를 알려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뢰를 맞아 가라앉는 배에서는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이러한 인도적인 모습은 프랑스인은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프랑스군, 영국군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저 생존을 갈망하는 인간의 동지의식이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국적이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그러나 그런 깁슨을 영국인(으로 표현되는 위선자)들은 죽음으로 몰아간다. 좌초되었던 선박이 뜨기를 기다리던 알렉스의 부대원들은 배의 중량을 줄여야 한다고 하자 깁슨부터 사지로 내몬다. 프랑스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다음은 그를 변호하는 토미라며 협박을 하는데, 이는 끝까지 깁슨을 보호하려는 토미와 대조된다. 이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어졌던 토미와 깁슨의 짧지만 기묘한 우정은 본래 인간 본연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가라앉는 배에 갇혀 깁슨은 죽어버렸다. 그의 실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였다.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쯤이면 살아 돌아간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평화로워져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국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 알렉스는 더더욱 집에 가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저 살아 돌아오는 것밖에 못 했던 자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기차에 오르기 전 담요를 나누어 주던 노인이 자신의 눈도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생각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뒤이어 담요를 건네받은 토미는 보았다. 노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역시도 전쟁에서 살아온 이였기에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던 것이다. 


  권력이 만들어낸 전쟁터와, 하나의 도구로 소모되며 허망하게 죽어간 이들. 왜 그곳에서 죽어야 했는지, 그 답을 주기 위해 권력은 수많은 명분을 만들어낸다. 때론 그것이 승리를 위한 희생이 될 수도 있고, 다음의 승리를 위한 값진 패배로 포장될 수도 있다. 결국, 죽어간 이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전쟁이기에 승전도 패전도 중요하지 않다. 노인의 말대로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되었다.




  어떠한 잔인한 장면 없이, 특출난 전쟁 영웅 없이 한스 짐머의 음악과 압도되는 화면 및 음향 효과로 완성된 이 영화는 기존의 전쟁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지루했을 수도 있겠다. 전쟁에 참여했던 여러 인종이나 여성의 역할을 배제한 채, 백인 남성들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비난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자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라도 그려질 수 있지만, 식민지였기 때문에 강제로 징집된 흑인들은 전혀 비추고 있지 않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주 명백한 반전영화라는 점은 좋게 평가해주고 싶다.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기에 아이맥스 관에서 다시 시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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