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는 야수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눈부시게 아름다운 벨은 자신을 위해 장미를 따다 주려던 아버지가 야수에게 잡혀가자 그를 대신해 야수의 성에 있기를 택하였다가 야수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 덕분에 야수는 마녀로 인해 걸려있던 저주가 풀리고, 아주 잘생긴 왕자였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미녀와 야수의 기본적인 줄거리이다. 


  나는 디즈니의 공주 시리즈 중에서 미녀와 야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던 건 순전히 엠마 왓슨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했던 라라랜드(La La Land, 2016)의 주인공 미아 역에 엠마 왓슨이 물망에 올랐지만 미녀와 야수 때문에 출연을 고사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었다. 이런 캐스팅 비화는 영화판에서 매우 흔한 일이긴 하지만 워낙에 라라랜드를, 또 엠마 스톤이 연기한 미아를 감명 깊게 봤던 차여서 자연스레 엠마 왓슨의 미아는 어땠을지 상상해보게 되었다. 동시에 라라랜드를 포기하면서 찍었다던 또 다른 뮤지컬 영화인 미녀와 야수는 어떨지 매우 궁금해졌다.
  게다가 엠마 왓슨은 페미니스트로서 평소 여성의 인권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인사인지라 그런 그가 선택한 영화는 적어도 기존의 영화들처럼 여성 캐릭터가 배경에 그치지는 않겠단 믿음이 있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려한 영상미 덕분에 볼거리는 풍부했고, 엠마 왓슨은 연기력은 좀 아쉬웠지만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정말로 아름다운 벨이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배우들의 등장이 놀라웠다. 


  그러나 보는 내내 왜 내가 어릴 때부터 미녀와 야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지금보다 어릴 때 더 잘 알았다. 도덕적인 신념이나 정의감이 강한 건 오히려 어린아이일 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를 교훈으로 주려는 것 같은 미녀와 야수는 참 이상하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인 벨은 그냥 못생긴 수준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닌 야수와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를 협박하고 자신을 감금하는 아주 무서운 괴물인데도 말이다. (여기에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주변에서 바람을 넣는 데다가, 그런 변명 아닌 변명을 들으며 자신을 감금한 이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름 신드롬도 담겨 있다) 그러면서 내면만을 보고 사랑에 빠진 그 착한 마음씨에 대한 보상을 받듯 잘생긴 남자, 그것도 한 나라의 왕자를 선물 받는다.
  또한, 애초에 저주를 내리는 자가 실제로는 매우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왜 못생긴 척, 더러운 척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요정은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면서, 정작 왕자를 시험할 때는 더럽고 늙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살 때도 그는 돈이 없고 더러우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미'와 대조되는 '추함'은 곧, 늙고, 거지의 모습이며, 또한 그렇기에 더럽다. 이 요소들은 갖춘 사람은 곧 추한 사람이라고 영화에서 누구보다 친절하게 구분 지어 정의를 내려주고 있다. 


  이렇게 사람도 아닌 아주 무섭고 못생긴 야수와 사랑에 빠지려면 아주 강력한 계기가 필요하다. 원작에서 부족했던 이런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야수와 벨의 과거 이야기를 넣었다는데, 추가된 부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하다.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잃고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엇나간 왕자는, 그렇기 때문에(?) 여성 편력이 생겼고 국민의 세금을 성을 꾸미는 데에 다 쓴다. 그러다가 추위를 피해서 들어온 노파를 무시했다가 저주에 걸린다. 도대체 왕자의 가정사가 그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위정자로서 저지른 실정의 변명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야수는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보다는 누가 이런 자신을 사랑해주겠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주전자나 촛대 등이 된 주변인이 대신해서 열심히 변명해줄 뿐.
  벨이 야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로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법 책을 이용하는 설정도 약간 어중간하다. 왜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자랐어야 했는지, 이 점은 벨이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사실 사랑에 빠지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설정을 충분히 잘 살리지 못한 것 같다. 둘 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계기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쓸 바에 차라리 이 설정을 빼고, 마을에서는 아무도 자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가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이라는 점을 좀 더 제대로 설명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고작 마을 한쪽에 위치한 야수의 성이 아니라 벨이 그토록 외치던 더 넓은 세상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한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든지 말이다. 개스톤은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할 만큼 잘생기고 멋진 인물이지만 벨은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벨이 개스톤을 거절하는 이유로 그의 무례한 태도나 남을 무시하는 성격 같은 점을 들지 않는다. 물론 영화 전개상 그 점을 충분히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그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벨 자체는 그것보다는 자신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하는 게 중요한데, 이 작은 마을에서는 책을 읽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벨이 외치는 더 넓은 세상이나 더 많은 세상 경험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부족한 개연성에도 다른 실사화 영화보다는 접근하기도 쉽고 인기도 좋은 것은 오히려 원작을 많이 안 건드렸기 때문인 것 같다. 설정을 완전히 바꾸면서 리메이크한 영화들은 자칫 잘못하면 원작이 동화라는 점이 장점이 아니라 너무 유치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옛 가치관이라 하여 비난을 받을지언정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은 사실 실패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처럼 빵빵한 배우들과 화려한 영상미를 갖춘 영화라면 더더욱. 
  기존 스토리는 유지하는 것과 별개로 인종 차별 문제나 동성애 관련 문제를 극복하려고 해서인지 캐릭터에 신경 쓴 것 같긴 하지만 결국 주인공이나 중요한 역할들 대부분은 백인이고 이성애자여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긴 하다.
  또한, 주인공의 케미가 전혀 안 맞는다. 극적인 효과를 더 내려면 야수가 왕자로 돌아왔을 때 더 덩치도 크고 눈부시게 잘생긴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엠마 왓슨보다 왕자나 개스톤 역의 배우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는 것도 좀 아쉬웠다. 물론 개스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영화에서 악역이 사랑받는 이유는 좀 더 나와 비슷하면서, 실제로는 조심해야 하는 표현들을 거침없이 뱉어주는 점들에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개스톤의 외모만 밝히고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모습들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괜히 21세기형 악역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개스톤 역의 루크 에반스는 엄청 잘생긴 배우이기도 하고 말이다. 르푸 역시 감초 역할로 매우 잘 해내 주는 것 같다.


  디즈니 영화에서는 음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빼도 될 것 같다. 그동안의 공주 시리즈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겨울왕국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명색이 대작 타이틀을 달고 나온 영화인데 이렇다 할 만큼의 좋은 넘버가 없어서 아쉽다. "Be our guest"는 영상을 가장 잘 살리고 화려했던 게 좋았고 개스톤의 넘버인 "Gaston"이 음악적으로는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다. "Evermore"은 레미제라블의 넘버 "Javert's Suicide"를 연상시킬 뻔했는데 야수의 목소리를 변조시켜놔서 좀 듣기 힘들었다.


  영화의 이런저런 점들을 떠나서 엠마 왓슨이 왜 벨 역을 선택했는지는 알 것 같긴 하다. 벨이 마냥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는 캐릭터는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 주체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벨의 주체성은 아버지가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를 척척 알 만큼 도구를 잘 아는 정도였으며, 마을을 벗어나고 싶고 더 큰 세상을 원하던 여성이지만 그것에 대한 노력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때 보았던 원작보다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나 개스톤과 르푸의 캐릭터 등이 좀 더 나은 것 같긴 하지만 엄청 좋다거나 진짜 별로라고 평가하기 모호한 영화인 것 같다. 그냥 원작의 실사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리뷰를 마무리할 때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이렇다.


  내가 만약 벨이었다면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물들과 엄청나게 과격한 야수가, 자신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문밖으로 못 나가게 하면서 나한테 잘해주는 괴이한 상황에서 야수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