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세계의 진짜 작가
박형서, <아르판> (2011 제 1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진짜 작가, 가짜 작가
'진짜 작가'는 어떤 작가일까. 소설 속 ‘나’에게 '진짜 작가'란 단 한 번뿐인 청춘을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오지에 바칠 수도 있는, 그러한 작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열정과는 별개로, ‘나’에게 '진짜 작가'는 반드시 문단에서 인정을 받고 독자에게 둘러싸여야 한다. 즉, 작가로서의 명예가 있어야 한다. 이는 데뷔하기도 전부터 순회강연이나 사인회 등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위와 같은 기준으로 봤을 때, 와카에서의 일들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들이 번번이 비판을 당하고, 추구하는 일정한 작품 세계 없이 유행에 따라 쓴 추리소설 역시 실패하였으며, 장편소설의 출간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잡지사보의 콩트 청탁까지 끊긴 ‘나’의 상황은 '진짜 작가'가 아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는 '진짜 작가'가 아닌 것이다.
반면 ‘아르판’은 ‘나’에게 '진짜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를 보여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 속에서도 자기 부족의 언어로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아르판’이야 말로 '진짜 작가'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독자에게 사인해줄 때에도 재치 있는 말을 써주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이러한 ‘아르판’을 매일매일 바라보며 '진짜 작가'란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아르판’ 역시 자신을 몰래 지켜보던 그의 존재를 알고 자연스레 그것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 같다. 이 부분은 소설 마지막에, “아리 도미알라”라고 하며 마치 예술의 DNA를 다 넘겨주고 할 일을 다 한 아버지처럼 떠나가는 ‘아르판’의 뒷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영화 <은교>를 떠올렸다. (원작 소설도 있지만 나는 영화만 보았으므로 영화 위주로 살펴보았다.) <은교>에서 ‘서지우’는 ‘나’처럼 명예를 중요시하고 대중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서지우’에게 예술적인 소질은 없다. <아르판> 속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그는 예술에 필요한 감각을 타고나는 기회를 잡지 못한 인물인 것이다. 아무리 소설을 써보아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시인 ‘이적요’의 감성을 따라잡을 수 없다. 평생을 시만 쓰던 ‘이적요’의 ‘심장’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면 이들의 예술적 감각의 차이는 잘 알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아르판>에서 ‘나’와 ‘아르판’의 관계와 같다. ‘나’는 와카에서의 경험을 아무리 소설로 옮기려 해도 실패하고 줄줄이 하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요리에 대한 재능이 없는 것처럼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열정은 있되 재능을 갖지 못했다. 반면 ‘아르판’은 소설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쓰는 것을 행복해하며, 결과물 역시 훌륭하다. ‘나’가 ‘아르판’의 소설을 번역하자마자 알아주는 작가로 떠오르고, 동시에 그 소설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수출되기까지 한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이 타고난 감각을 배우기 위해 ‘서지우’는 ‘이적요’ 밑에서 문하생을 자처하지만 술을 마실 때마다 속에 있던 본성을 드러내며 열등감을 분출한다. 스승 덕분에 대중적 스타 작가가 된 그는 저절로 얻게 된 명예에 우쭐하면서도 속으로는 넘을 수 없는 산에 대해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이적요’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간접적인 말과 행동, 눈빛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재능 없는 ‘서지우’에게 닿지 않는다. <아르판>의 ‘아르판’ 역시도 그에게 간접적인 가르침을 준다. ‘아르판’의 삶 자체가 ‘나’에겐 가르침이 된 것이다. ‘나’는 ‘서지우’와는 달리 그의 가르침을 분명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생계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돈과 명예에 대한 욕구로 그 가르침을 외면하며 표절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자신이 가짜 작가라는 건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명예로운 작가 역시도 '진짜 작가'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르판’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또 외면하였다. 이 때문에 자신의 표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얻게 된 명성을 이용하여 “제 3세계작가축제”를 기획하고 ‘아르판’을 초대한다. (‘나’는 ‘아르판’의 소설을 표절하고 나서 마치 자신의 잘못에 대해 혼날 것을 아는 어린아이처럼 아등바등한다. 독자 역시 ‘아르판’의 생각을 알 수 없으므로 ‘나’의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이처럼 ‘나’의 심리는 1인칭 시점으로 쓰이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적요’가 쓴 소설 ‘은교’를 ‘서지우’가 발견하게 된다. ‘은교’는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을 담은 금기된 이야기임에도 정말로 아름다운 글이었다. 다시 한 번 넘을 수 없는 산에 대한 열등감을 느낀 ‘서지우’는 ‘은교’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여 이상 문학상을 받게 된다. 감추려 했던 ‘은교’를 세상에 드러내놓은 것에 대한 스승의 분노에 ‘서지우’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이렇게 대응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그냥 반닫이 안에 넣어둘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70대 노인하고 여고생 관계, 그거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러운 스캔들이라구요! (…) 어차피 그거 선생님 이름으로 발표 못 하잖아요! |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보다 더욱 흥분해서 말하는 이러한 ‘서지우’의 태도는 <아르판>에서 ‘나’가 ‘아르판’에게 말하는 장면과 겹쳐 보인다.
네, 나는 당신 것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덧칠함으로써 더욱 멋지게 살려냈습니다. 내가 훔치지 않았더라도 당신 이야기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세상에 드러났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훔치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머지않아 당신과 함께 영원히 묻혀버릴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입니까? 불멸하는 것과 영원히 묻히는 것, 어느 쪽을 원합니까? 당신은 당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필경 수년 내에 쓰러져 묻힐 저 갸우뚱한 오두막에서의 명예를 사랑합니까? |
자신의 작품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해 ‘이적요’와 ‘아르판’의 대응 방식은 다른 듯 같다. ‘이적요’는 사실은 한 번도 진짜 제자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서지우’이지만, 그가 소설 ‘은교’로 상을 받는 시상식에 참석하여 담담히 축사를 해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빛과 축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준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이려 했던 것은 소설 ‘은교’ 때문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했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은교’를 집필한 곳에서 소녀 ‘은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기만한 그에게 분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르판’은 ‘나’의 표절 행위마저도 자신의 가르침으로 생각한다. 진정한 소설이란 무엇인가, '진짜 작가'란 무엇인가를 ‘나’에게 모두 전수해주고 후련한 듯 떠나가는 ‘아르판’의 모습은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열등감에 쌓여 ‘아르판’을 질투하던 ‘나’가 간과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르판’은 천재이다. 소설을 쓰는 데 있어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은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 같아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르판’은 ‘천재’를 넘어서 ‘즐기는 자’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처럼 ‘나’가 ‘아르판’에 닿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르판’은 표절을 한 ‘나’를 굳이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는데다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소설의 의미, '진짜 작가'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 3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이 소설은 소설과 작가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사라져가는 소수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까지도 담고 있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이른바 ‘글로벌 시대’라는 타이틀 속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 소수의 것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일부에서는 ‘글로벌’한 흐름에 따라가려면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영어 공용화를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경쟁력 없는 한국어보다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영어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나름대로 국제적 입지를 다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는데 하물며 소설 속 ‘와카’ 부족처럼 힘없는 소수 민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기가 쉬울까. 이 때문에 와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잊고 대신에 버마어 혹은 타이어를 사용한다. 전통을 추구하다가 죽은 노파 ‘미슈’는 와카어를 ‘나’에게 가르치면서도 이제는 아무도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미슈’처럼 전통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러나 ‘아르판’은 모두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와카의 언어로 소설까지 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와카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제 3세계작가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러한 ‘아르판’을 비웃는다. 단순히 ‘아르판’이라는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너머 와카의 언어와 문화, 더 나아가 세계적인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제 3세계를 비웃는 것이다. 와카에서의 삶을 경험해 본 ‘나’는 이들의 비웃음이 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순히 작가로서 경험을 늘리고자 와카에 갔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와카에 사로잡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높이”를 향한 순수한 동경, 그저 황혼이 잘 보이게 집을 짓다가 생긴 구불구불한 길, 지겨울 만큼 고요한 공간, 이 모두가 경제적 논리의 삶에 지친 ‘나’에게 소중한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높이”로 대표되는 닿지 못할 무언가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것을 모두 잊고 말았다. 와카의 문화는, 단순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고 살았던 순수하고 원초적인 인간의 보편적인 문화인 것이다.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와카의 궁벽함에 지친 나머지 마당에 개처럼 드러누워 불평하고 있었다. 이게 다 뭐람? 바깥은 씽씽 돌아가는데 여기 숨어 저희들끼리만 높이 쌓으면 장땡인가? 그러자 곁에서 볕을 쬐던 미슈가 대꾸했다. / 와카에는 와카의 방식이 있단다. (…) / “바보야, 세상 모두가 와카라니까.” |
소설에서 미슈는 와카의 문화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세상 모두가 와카라”고 말한다. 이는 이 말과도 같다.
모두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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