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나, 인간은 너




  박민규, <로드킬> (2012 제 57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로드킬>은 전체적으로 두 개의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주검을 수거하는 기계 ‘막시’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양란’의 투기장에서 생명을 거는 이른바 ‘아시안룰렛’ 게임으로 돈을 벌어서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시도하는 인간 ‘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두 스토리와 맞물려서 1인칭, 2인칭 시점이 교차하여 나타나고 있으며, 배경 역시 두 개의 장소에서 시작된다. 시점도 다르게 쓰이고 중심인물 또한 달라서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던 두 스토리는 전개되면서 하나의 인과관계로 결합된다.


  첫 번째 스토리는 ‘막시’가 서술자이자 사건의 중심인물인 1인칭 시점이다. 사실 ‘막시’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기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 스토리는 인간 ‘리’를 중심인물로 하여 2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이렇게 다른 시점의 사용은 소설의 전체적인 배경 및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은 미래의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자는 ‘리’가 그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 말고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룰렛 게임의 상대자였던 ‘사이토’는 과거에 일본인이었으나 ‘양란’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다. 하나의 거대한 기업체가 되어버린 아시아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엔 아시아라는 이름의 ‘회사’만 있을 뿐 더 이상 한국, 중국, 일본 등의 국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역시도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부서이다. 이 때문에 ‘러시안룰렛’이 아닌 ‘아시안룰렛’이라고 하고 있다.) <로드킬> 속 미래의 아시아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와 이로부터 보호받는 국민의 관계가 아니다. 그저 기업과 그 속에 속하거나, 속하지 못하고 밀려난 개인일 뿐이다.


  또한 미래의 아시아는 철저히 기계가 모든 것을 지배한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그 기계를 만든 인간조차 배척된다. 인간의 모든 역할을 기계가 대체했기 때문이다. 기계 ‘막시’가 맡은 역할은 셔틀이 도로를 건너가던 동물을 치었을 때 그 주검을 처리하는 일이다. 과거의 자동차들과 다르게 미래의 차는 셔틀이라고 불리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셔틀에 동물이 치이는 로드킬은 빈번했고, 언제 셔틀이 지나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일을 하는 것은 기계 ‘막시’와 ‘마오’이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은 ‘왕 웨이’라는 인간이었으나 셔틀의 존재가 매우 위험해지면서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였다.


  ‘리’가 살고 있는 ‘양란’ 부서는 이렇게 철저히 기계화된 아시아에서 기계로 인하여 자리에서 밀려난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심지어 단순하고 인간이 하기 위험한 직종이 아니라 꽤 높은 직책인 계장직에 있었던 ‘사이토’조차 기계에 자리를 빼앗기었다. 이곳 사람들은 과거에 국가로부터 받았던 복지나 혜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서로의 물건을 빼앗는다. 이 때문에 서로를 믿을 수 없으며 목숨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그때그때 식구(食口)를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사람 수가 많을수록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란’에서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이토’와 ‘리’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룰렛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로 인한 탈국경을 보여 준다. 현대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원리로 돌아가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 자본주의가 미래에는 더욱더 발달하여 국가의 개념까지 없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미래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의 아시아는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만이 존재하고 이러한 사람들보다도 기계가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기계인 ‘마오’는 모차르트를 즐겨 듣고, 그러한 ‘마오’를 잃었을 때 ‘막시’는 인간처럼 슬퍼한다. 그리고 ‘막시’와 마오가 끊임없이 인간의 세상과 그들의 감정에 대해 궁금해 하며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반면, 인간인 ‘요사’는 규정을 어기기 일쑤이고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기도 한다. 인간의 아기 시체가 발견됐다고 해도 그 사실을 덮으려 하고, 기계가 가질 감정에 대해서 극도로 질색하며, (‘막시’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나의 삶을 살아온 ‘마오’를 가차 없이 꺼버리는 모습도 보인다. 게다가 인간들이 사는 ‘양란’의 ‘쓰레기들’은 사람의 생명을 한낱 게임으로 바라보며 투기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에서 ‘양란’의 인간들은 동물로 비유된다. ‘막시’가 동물의 주검인 줄 알고 치웠던 덩어리들은 ‘리’를 비롯한 인간 세 명의 시체였는데, 그것을 처리하면서 ‘막시’와 ‘마오’가 나누는 대화 속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인간들은 왜 동물을 버리는 걸까? 글쎄, 하며 동작을 멈춘 마오가 다시 커팅을 하며 말을 잇는다. 귀찮아져서가 아닐까? (중략) 더는 기를 필요가 없어진 거야. (중략) 즉 반드시 기르거나 버려야 한다가 아니고 기르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이익이 된 셈이랄까. (중략) 실은 뭐, 죽어버려...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소설의 또 다른 부분에는

 


  세대가 바뀌면서 양란의 인구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쓰레기 매입의 목적은 분해라는 사실을, 아시아를 이끄는 인간들은 잘 알고 있었다.

 


라는 내용이 있다.


  결국 동물처럼 치워지는 ‘양란’ 사람들은 기계화로 인해 필요가 없어짐으로써 기업 아시아로부터 버려진 것이다. 아시아를 이끄는 인간들은 차라리 사람들이 분해되길, 즉 서로를 죽이든지 굶어 죽든지 간에 사라지길 바라며 ‘양란’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들은 외부인들이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양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꺼렸다. ‘양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의구심을 갖고 저항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항은 철저하게 이들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막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양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은 셔틀이 달리는 도로를 설치함으로써 차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를 창조해낸 과학은 이제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것들의 저항을 두려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쉬엔쥐! 쉬엔쥐! 함성이 들려온다. 나른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본 후 너는 쓰레기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들이 실은 성실하고 무력한 인간들이었음을 너는 끝내 알지 못한다.

 


  ‘양란’ 속 인간의 존엄성이 땅으로 떨어지는 만큼, 그들이 인간으로서 외치는 저항은 힘이 없다. ‘쓰레기들’이 할 수 있는 외침이라고는 그들이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마지막으로 행사했던 권리인 선거밖에 없었다. ‘쓰레기들’은 사실 사회적인 구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밀려난 힘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거로 인해 자신들의 권리를 잃었고, 과학으로 인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었다.


  ‘양란’ 사람이건 기업 아시아의 수뇌부이건 간에 아시아의 인간들은 모두 인간성을 상실했다. 오히려 기계가 더욱 인간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소설 속 배경과 맞물리면서 기계는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고 인간은 2인칭 시점으로 ‘너’로 표현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인칭 대명사는 사람에게만 쓰일 수 있는데다가 그것도 2인칭, 3인칭도 아닌 1인칭 대명사가 쓰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너’로 표현된 인간보다도 ‘나’인 기계가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이 소설은 지극히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 ‘리’는 도로 너머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곳에서는 인간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반면 ‘막시’는 인간의 빛으로 가득 찬 곳으로 가고 싶어 하였다. 죽은 아기를 발견하기 전에 아는 인간이라고는 ‘요사’뿐이었을 만큼 ‘막시’가 있는 곳은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하지만 결국 인간적인 삶에 대한 동경이라는 점은 같다.


  한편 ‘리’는 룰렛 게임으로 생명을 담보로 벌어 온 돈을 ‘란’과 그녀의 아기, 그리고 벙어리 ‘마루’까지 양란에서 함께 도망치기 위해 사용한다. ‘양란’에서 식구는 실제 가족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모인 얕은 관계인데도 그들을 챙긴 것이다. 특히 ‘리’는 제 아이가 아닐 수도 있는 아기를 죽음을 예감한 찰나의 순간에 레일 밖으로 던진다. 이는 아기가 살기를, 아니 적어도 인간의 형태조차 알 수 없게 죽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 ‘리’의 이러한 행동은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게 던져진 아기의 시체는 그나마 다행히도 인간의 모습을 갖춘 채 죽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항상 원형의 모습이 다 사라져버린 덩어리들을 무의미하게 처리하던 ‘막시’는 아기 시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규정을 되새기며 자신의 몸이 꺼질 때까지도 그것을 지켜주려 애썼다.


  작가는 이러한 ‘리’와 ‘막시’의 행동을 통해, 아무리 자본주의가 발달함으로써 사람들이 비인간적이 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끝까지 지켜질 수 있다는,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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